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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광석 칼럼] 도광양회

기사승인 2024.09.26  11:29: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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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옥광석 목사/직전평양제일노회장·동도교회·천마산기도원 원장

▲ 제109회 총회 현장인 울산우정교회 마당에서 (최범규 목사, 옥광석 목사, 울산 대영교회 조운 목사, 최종천 목사), 좌측부터

중서부 어느 모텔에서 심장마비로 죽다가 살았다. 이날이 2005년 2월 19일 새벽이었다. 그리고 오후 5시쯤 드디어 시카고 헤브론교회에 도착하였다. 담임 목사님을 찾아뵙고 인사하였다. 교회에서 교회 영내에 있는 선교관을 임시 숙소로 마련해 주었다. 우리 가족의 공간은 선교관 단독 주택 2층이었다. 이곳에서 시카고에서의 첫날을 보냈다. 다음 날, 선교관을 살펴보니 엉망이었다. 하지만 며칠 후에 약속대로 교회에서 좋은 사택을 마련해 줄 것으로 기대했다. 그런데 한 달이 지나도 다른 사택을 제공해주지 않았다. 그냥 선교관에 살라고. 당회의 결정이니 어쩔 수 없었다. 하지만 여기서 계속 사는 것은 여간 불편한 일이 아니었다.
 

▲ 제109회 총회 현장에서 평양제일노회원 (심상영 장로, 권순직 목사, 최범규 목사, 옥광석 목사, 이동혁 장로, 김강환 장로), 좌측부터

1층에는 나이가 지긋하신 행정 목사님이 사셨다. 지하에는 관리 목사님 내외가 딸 셋을 데리고 살았다. 식구가 다섯이다. 그나마 입구가 달라 괜찮았다. 하지만 1층에 사는 행정 목사님은 달랐다. 우리와 공동생활을 하였다. 1층 부엌과 거실을 공동으로 사용했다. 1, 2층이 중앙 계단으로 연결되어 있었다. 이러니 사생활을 전혀 기대할 수 없었다. 목조 건물이라 웬만한 말은 다 들릴 정도다. 나도 불편했다. 아내와 아이들은 정말 불편하였다. 불편함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뉴저지의 기근으로 인하여 그 불편함의 무게는 더욱 가중되었다. 하지만 참아야 했다. 꾹 참았다. 참는 수밖에 없었다. 참는 자가 복이 있다는 성경대로. 오히려 감사로 받았다.
 

▲ 사촌 형인 옥성석 목사(충정교회 담임)와 함께 제109회 총회기간 중 울산대영교회 조찬모임 후에(좌측 옥성석 목사, 우측 옥광석 목사)

한 주 정도 머물 거로 생각했던 이 집에서 1년 반을 살았다. 무엇보다 물 때문에 힘들었다. 이 집은 우물 지하수를 사용한다. 지하수에는 석회와 철분이 많아 소금으로 정화하여 사용해야 한다. 하지만 관리가 전혀 되지 않아 샤워실은 누렇게 녹슬어 있었다. 지하 정수기의 소금이 떨어진 지 오래되었다. 그뿐이 아니다. 집만 컸지 관리 소홀로 집 안팎에 문제가 많았다. 무엇보다 쥐가 자주 출몰하여 골머리를 앓았다. 거실에서도 쥐가 자주 출현하고, 지붕에도 쥐들이 출몰하여 잠자리가 정말 불편했다. 쥐덫을 놓았다. 깊은 밤에 ‘딱’, ‘딱’하는 소리가 난다. 쥐가 잡혔다는 신호다. 새벽이면 쥐덫을 치우고 새벽기도회에 나갔다. 그렇게 주님을 맞이하기 전에 쥐덫을 맞이하며 하루의 일과를 시작하였다.
 

▲ 울산 슬도 새벽 전경 (사진 옥광석 목사)

무엇보다 지하에 사시는 관리 목사님 가정은 안쓰러웠다. 그나마 우리는 지상이라 햇빛이 들어왔다. 하지만 지하는 달랐다. 게다가 비만 오면 배수가 잘되지 않아 지하 방에 물이 차고 넘쳤다. 우기 때마다 집안 살림을 밖으로 내다 햇볕에 말리는 광경을 보니 마음이 짠했다. 그래서 이곳에서 굳은 결심을 하였다. ‘두 번 다시 실패하지 말자’라고 다짐했다. 실패하면 삶이 비참해진다. 누군가 그랬다. 실패는 우리를 버스 종점으로 인도한다고. 버스 종점은 대부분 인생 루저(loser/패배자)들이 사는 열악한 곳이다. 나의 버스 종점이 바로 여기였다. 하지만 새벽기도회는 하루도 빠지지 않았다. 새벽 제단에 나아가 마음을 주님께 다 쏟아내었다. 6개월 후에는 1층에 사는 목사님이 나가고, 1년 후에는 지하에 사는 목사님도 나갔다. 이후 이 큰 집에서 우리 가족은 1년 6개월을 더 살았다. 방이 일곱 개인 집에서 어린 자녀들이 얼마나 좋다고 뛰어다니든지. 2년 6개월 후에는 교회에서 마련해준 새 사택으로 이사를 하였다. 집을 보고 깜짝 놀랐다. 상상할 수 없는 좋은 집에서 살았다. 세 자녀는 지금도 그런다. 그때 이 집이 가장 좋았다고. 이곳에서 맞이한 세 번의 화이트 크리스마스를 평생 잊지 못한다고.
 

▲ 울산 슬도 일출 광경 (사진 옥광석 목사)

‘도광양회’라는 말이 있다. 도광은 ‘빛을 감춘다’는 뜻이고, 양회는 ‘어둠 속에서 때를 기다린다’는 뜻이다. 한 마디로 밖으로 능력을 드러내지 않고, 조용히 실력을 축적한다는 의미로 어려운 때에 자신의 재능이나 이름을 숨기며 참고 기다린다는 중국 고사성어다. 삼국지연의에서 유비가 여포에게 쫓겨 조조의 식객으로 머물던 무렵, 유비는 살아남고자 일부러 몸을 낮추고 소일까지 하며 수모까지 참았다. 이것으로 조조의 경계심을 풀었다는 뜻에서 유래된 말이다.

살다 보면, 목회하다 보면, 원치 않는 실패와 어려움으로 수모를 당할 때도 찾아온다. 하지만 이럴 때 ‘도광양회’로 자신을 낮추고 재기의 칼을 갈면 필시 그 재능을 펼칠 좋은 때가 올 것이다. 예장합동 제109회 총회(울산 우정교회) 참석 셋째 날, 숙소 근처에 있는 울산 방어진 슬도를 찾았다. 아주 작은 포구다. 하지만 일출과 새벽 바다가 너무 아름다웠다. 마음에 쏙 들었다. 일출은 정말 눈부셨다. 이날 새벽 파도 소리를 들으면서 새벽하늘을 바라보는데 하염없이 눈물이 흘렀다. 감격과 감사의 눈물이다. 은혜의 눈물이다. 그때 그 시절이 생각나서 그랬나 보다. 십자가 붙들고 ‘도광양회’에 성공하였으니. 여태껏 인도하신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이 고마워서도 나도 모르게 눈물이 하염없이 흘렀나 보다. 호르몬 변화 때문만이 아닌 것 같다. 
 

▲ 동도교회

◆편집자 주=옥광석 목사는 부산의 목회자(故 옥치상 목사/성동교회) 가정에서 태어나 총신대학교(B.A.), 총신대학교 신학대학원(M.Div.), 美 달라스신학교(S.T.M.)를 졸업한 후, 시카고 트리니티신학교에서 목회학박사(D.Min.) 과정에서 공부했다. 목회적으로는 사랑의교회(당시 담임:옥한흠 목사), 뉴욕퀸즈장로교회, 시카고헤브론교회를 섬겼다. 현재 서울 동대문구 제기동에 소재한 동도교회 담임목사로 그리고 남양주에 위치한 천마산기도원 원장으로 섬기고 있다. 총회적으로는 제108회기에서 목양아카데미 <교회여일어나라> 위원으로 섬겼다.

옥광석 목사 pearlksoak@gmail.com

<저작권자 © 합동헤럴드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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