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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진하 칼럼] 우주를 품을 만한 관대함으로

기사승인 2021.05.05  14:16: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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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진하 목사/정년연구위원장·증경평양노회장·예수사랑교회

▲ 논설위원/김진하 목사

예수님의 활동무대와 사역 반경은 사실 좁았다. 이스라엘 땅의 크기는 우리나라 강원도 정도 되는데 그 좁은 땅 팔레스타인의 밖으로 나가본 일이 없었다. 물론 태어나면서 헤롯왕의 박해로 부모님과 함께 이집트로 피난을 다녀온 적은 있었지만 그건 아주 어렸을 때의 일이다. 당시 세계 문화의 중심이라고 하는 로마나 헬라 문화의 중심지인 그리스의 아덴에도 가 본적이 없었을 뿐 아니라 당대 유명했던 학자들을 만났거나 학교 교육을 받은 기록조차도 없다.

이런 환경 속에서 성장했고 활동했다면 당연히 마음이 좁고 마음도 옹졸했을 듯싶지만 복음서에 나타난 예수님은 그 마음이 한 없이 넓고, 자애롭고, 관대한 분이셨다. 예수님의 너그러우심은 원수까지도 포함했다. 주님은 “원수를 사랑하고 핍박하는 사람을 위하여 기도하라”고 가르치셨다. 또한 하늘에 계신 하나님은 “악한 자에게나, 선한 자에게나 똑 같이 해와 비를 내리시는 관대한 분이시기 때문에 그 너그러움을 우리도 배워야 할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나를 사랑해 주는 사람만 사랑하고 나와 가까운 사람에게만 인사를 한다면 믿지 않는 이방사람과 다를 바가 없다고 하셨는데 예수님은 말뿐만이 아니라 이런 관대함과 자애로움을 친히 실천하셨다. 자기를 십자가에 못 박고 조롱하는 사람들의 용서를 하나님께 비셨고 자기를 배신한 제자 가룟 유다를 끝까지 버리지 않으시며 불쌍히 여기셨다. 가룟 유다가 선생을 악한 사람들에게 넘겨주는 최후의 순간까지도 그 사실을 알고 계시면서도 “친구”라고 부르시기도 했다.

베드로가 잘못하는 사람을 일곱 번까지 용서하면 됩니까? 하고 물었을 때 예수께서는 일흔 번씩 일곱 번 이라도 용서하라고 말씀을 하셨는데 그것은 490번의 용서가 아니라 한없는 용서를 의미했다. (endless-끝없는) 우리는 두 번 용서하는 것도 힘겨워하고 많은 경우에는 한 번도 용서하지 못하지만 예수의 마음을 품으려면 죽을 때까지 용서하는 마음을 가져야 할 것이다. 만약 기도하는 도중에 어떤 사람에게 원망들을 만한 일이 생각났다면 잠시 기도를 멈추고 먼저 그 사람을 찾아가 용서하라고 하셨다. 용서 없는 기도는 효력이 없다는 말씀일 것이다.

예수님의 마음은 바다같이 넓으셔서 누구나 차별하지 않고 품으시며 받아주셨다. 국적도 가리지 않았고, 인종의 차별도 없었고 가난한 자나 부한 자나 심지어는 사람들이 상종하려고도 하지 않았던 세리와 창기들까지도 품어주셨다. 어떤 높은 벽도 그의 너그러움을 갈라놓지 못했다.

열두 제자들의 면면을 살펴보면 역시 예수님의 넓은 마음을 읽어보게 된다. 제자들 중에는 율법학자나 서기관과 같은 종교적 신망을 받는 사람들은 하나도 없었다. 대신에 천한 직업에 속하는 고기 잡는 어부처럼 육체노동자가 여럿이 있었고 마태는 세금을 거두는 세리로서 당시 로마의 앞잡이 노릇을 하는 매국노로 치부되었다.

야고보는 보아너게 (천둥의 아들) 란 별명을 가질 만큼 성격이 급한 사람임에도 용납을 하셨다. 베드로는 때론 열렬한 신앙고백을 하기도 하다가 바로 뒤를 이어 스승을 부인하는 변화무쌍한 인물이었고 수도 없이 실수를 밥 먹듯 했던 사람이었다. 가룟유다는 잘 알려지지도 않은 가룟 지방 사람인데다 동료를 딛고 일어서는데 주저하지 않는 야망의 사람이었다. 도마는 의심의 눈초리로 가득 찬 회색주의자였고 세베대의 두 아들 야고보와 요한은 어머니의 치맛바람을 앞세워 주님 나라가 회복되면 주님 좌우편에 앉으려는 야망이 가득한 형제였다.

이런 천박하고, 허물투성이의 인물들임을 알면서도 주님은 그들을 제자로 선택하셨다. 현재를 보지 않고 미래의 가능성을 보시면서 넓은 마음으로 사람을 품어 선택하신 것이었다. 주님 십자가에 돌아가실 때는 제자들 거의 모두가 도망가 숨었지만 이후에는 그들 모두가 성령 받고 변화되어 주님이 맡기고 가신 천국 복음을 땅 끝까지 전하는데 아낌없이 쓰임 받았을 뿐 아니라 복음을 위해 순교로 삶을 마감한 인물들이 되었다.

예수는 고향 나사렛에서 배척받고 산벼랑에서 밀쳐 떨어뜨리려는 음모를 모면한 일도 있었다. 그러나 주님은 그들을 저주하지 않으시고 ‘선지자가 원래 고향에서 환영받지 못하는 법’이라고 하시면서 그들을 불쌍히 여기시고 위하여 기도해 주셨다. 예수님은 태평양뿐 아니라 온 우주라도 품을만한 넓고 깊은 마음을 지니신 분이셨다.

우리는 주님의 제자요 복음의 증인이요 전달자들이다. 우리의 옹졸함 때문에 귀한 복음이 방해를 받아서는 안 될 것이다. 주변의 사람들이 우리를 보고 “난 당신이 믿는 하나님이라면 절대 안 믿어” 라든지 “당신이 나가는 교회라면 절대 안가” 라고 한다면? 이건 비극이다. 주님이 보여주셨던 바다보다 넓은 마음, 온 우주를 품을 만한 관대함으로 이웃을 품어주고 이웃을 사랑해야겠다. 주님! 주님의 마음을 닮게 하옵소서.

논설위원/김진하 목사 pastor88@hanmail.net

<저작권자 © 합동헤럴드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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