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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진하 칼럼] 환경은 기도하도록 도와주지 않는다

기사승인 2021.11.24  09:09: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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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진하 목사/前 정년연구위원장·서북협상임회장·총동창회수석부회장

▲ 논설위원/김진하 목사

예수께서는 하루 종일 힘써 복음을 전파하셨다. 더러운 귀신들을 내어i으셨고 시몬 베드로의 장모님 집을 방문하여 심각한 열병도 치료해 주셨다. 그렇게 하루 종일 섬기시다 보니 어느덧 날이 저물어 저녁이 되었다. 주님도 사람의 몸을 입으신 분이신지라 역시 피곤하셨을 것이다. 주님 시대에 피로회복제 박카스가 있었다면 사역 마치고 박카스와 우루사를 찾으셨을 것이다. 예수께서 일과를 마치시고 숙소로 발을 옮기셨는데 그곳에는 각색 병든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주님은 이들을 어떻게 대하셨을까?

오늘은 피곤하니 다음에 오라고 하셨을까? 몇 명만 선별적으로 보아주겠다고 하셨을까? 번호표를 나눠주든지 하셨을까? 주님은 섬기는 종처럼 그들을 다 살펴보셨다. 마지막 남은 사람까지 다 치료하여 보내셨으니 아마도 깊은 밤중이거나 새벽녘 이었을 것이다. 이렇게 피곤한 하루를 보내시고 난 다음날의 일과를 성경은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막1:35) 새벽 아직도 밝기 전에 예수께서 일어나 나가 한적한 곳으로 가사 거기서 기도하시더니... 이것이 우리 주님의 하루 일과였고, 하루하루의 모습이었다. 매일 매순간 주님은 이렇게 사셨다. 절기마다 한 번씩 행사처럼 기도하신 것이 아니었고 매일을 이렇게 사셨다는 말이다.

주님의 환경에서 보듯이 우리를 둘러싼 환경은 우리로 하여금 기도하도록 도와주지 않는다. 피곤하다고, 바쁘다고, 일이 많다고, 잔치라고... 결코 기도를 쉬라 하지 않는다. 우린 기도를 생각할 때 애초부터 환경이 우리의 기도생활을 도와주리라고 생각하지 말아야 한다. 오히려 거룩하고 경건한 기도생활을 이어온 신앙의 선배들은 거친 환경과 싸워 이긴 사람들이었다. 기도하는 사람들에게 환경은 도움을 기대할 대상이 아니고 극복해야 할 대상이다.

남편 반대로 어렵게 예수를 믿던 여 집사가 있었다. 집사였지만 늘 눈물로 살았고 헌금도 몰래 무명으로 했고 새벽특별집회가 열릴 때마다 참으로 고민스러웠다. 시계를 손에 잡고 잠을 청했고 성경은 부엌 문지방에 숨겨두었다 가지고 나가곤 했다. 거의 밤을 뜬눈으로 기다렸다 새벽에 남편 몰래 살그머니 방을 나오곤 했다. 그런데 기도의 응답이었는지 남편의 마음이 원만해져 교회까지 함께 나오게 되었다. 이젠 남편은 방해자가 아니고 돕는 협력자였다. 그 여 집사의 얼굴은 함박꽃처럼 밝아졌고 늘 웃으며 인사를 했고, 기도도, 교회 봉사도 힘껏 할 수 있었다.

그런데 6개월쯤 지난 어느 날 목사님과 상담을 하게 되었다. “내 신앙이 왜 이렇게 되었는지 모르겠습니다. 전보다 훨씬 시간도 많고, 자유가 있는데도 기도생활과 새벽기도 참석은 개점휴업 상태가 되고 말았습니다. 이젠 주일까지 빼먹고 남편과 등산을 함께 다녔고, 토요일엔 1박2일로 남해안으로 여행도 다녀왔습니다.” 그렇다 이것이 아이러니한 영적인 현실이다. 우리 사람이 얼마나 약한 존재인지를 보여주는 현실이다. 기독교는 환경의 보호를 받으며 성장한 것이 아니었고 환경의 거친 도전을 받으며 성장했음을 기억해야한다.

고된 일과를 마치신 후 새벽 미명에 기도하러 한적한 곳으로 나가시는 예수님의 모습은 환경을 핑계로 기도하지 않는 우리에게 커다란 도전을 준다. 좀 이상하지 않는가? 능력 없는 사람이 능력을 받기 위해 기도하는 것은 이해가 가지만 성령의 능력을 한 없이 받으신 예수께서 무엇이든 할 수 있고, 가능한 능력을 지니신 예수께서 무엇 때문에 환경과 싸우며 기도해야 했을까?

기도할 것을 권면했을 때 가끔 이렇게 말하는 교인들을 만난다. “목사님 저도 기도해야 하는 줄은 압니다. 그러나 지금은 제가 기도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어떤 상황이 기도할 수 있는 상황인가? 언제쯤 되면 기도할 수 없는 환경이 바뀌어 맘껏 기도할 수 있게 될까? 지칠 줄 모르는 기도의 열정으로 살았던 사람들은 환경의 도움을 받았던 사람들이 아니었고 환경과 맞서 싸운 사람들이었다.

청소년기에는 입시에 쫓겨 과외와 학원 때문에 기도 못하고, 대학가서는 축제와 미팅, 동아리활동, MT, 취직준비, 어학연수 때문에 기도 할 수 없고, 시집 장가간 후에는 돈 벌고, 애들 키우고, 돌보기 바빠서 못하고, 노년이 되면 허무한 인생 관광 다니고 등산, 배드민턴, 약수터 가는 일이 우선이라 기도 못하고, 더 늙어선 기력이 쇠하여 걸을 힘도 없어 역시 기도를 못한다.

기도하고자 하는 사람에겐 환경은 싸워 이길 적군이지 도움을 기대할 아군이 아니란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주님은 기도할 상황에 떠밀려서 한적한 곳으로 나가신 것이 아니었고 기도할 환경이 되었기에 하나님께 매달린 것도 아니었다. 우린 애초부터 기도 생활을 위해서는 환경과의 타협을 거부하는 단호한 자세가 필요하다. 결국 따지고 보면 우리의 견고하지 못한 기도생활은 환경 탓이라기보다는 게으름 때문인 것이다. 기도할 수 있을 때 기도의 무릎을 주께 드리자. 기회를 잃어버리면 아무리 무릎을 꿇으려고 해도 꿇을 수 없는 때가 올 수 있기 때문이다.

논설위원/김진하 목사 pastor88@hanmail.net

<저작권자 © 합동헤럴드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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